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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앤드마이크][긴급점검] 자유시참변에서 한국 독립군 몰살 가담한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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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09-14 00:07 조회1,7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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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가 벌였다는 봉오동·청산리전투는 알고보면 대승·대첩이 아니라 잘해야 무승부였다.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해서는 동료 독립군을 몰살하는 편에 섰던 사람이 홍범도다. 레닌으로부터 소비에트 적군 편입을 거부하는 한국 독립군을 청소해줘 고맙다고 격려금과 권총까지 선물받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된 사람이다. 홍범도가 과연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그를 “최고의 예우로 보답”하려는 것이며,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려는 것일까?

이번 광복절에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돼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돌아온단다. 문재인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해 8월 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 광복절 저녁 한국에 도착하며, 16일과 17일 이틀간 국민 추모 기간을 거쳐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아 SNS에 “독립군을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라며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사의 영웅으로 기리고 있는 분인 만큼 최고의 예우를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이번 유해 봉환에 맞춰 홍범도 장군에게 애국심 고취 및 민족 정체성 함양 등의 공로를 인정해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단다. 홍범도 장군은 1962년 2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된 바 있다.

#. 머슴의 아들, 게릴라전으로 일본군 공격

그렇다면 홍범도는 누구인가.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홍범도는 “1920년 최진동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越江)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둔 인물”(연합뉴스, 2021년 8월 12일)로 알려졌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속의 홍범도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와 얼마나 부합하는 것일까? 이제부터 신화로 범벅이 된 홍범도가 아닌, 사료를 통해 홍범도의 실체를 추적해 본다.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혁명정권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받고 기념촬영을 한 홍범도. 오른쪽은 동료 독립운동가 최진동이다.
머슴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는 15세 되던 1883년, 평양감영 나팔수로 군대와 인연을 맺는다. 평양에서 4년여 병졸 생활을 하던 중 같은 부대 소속의 부패한 장교와 시비 끝에 상관을 구타하고 탈영한다. 황해도 수안군의 종이 제조소에 숨어 일하던 중 주인을 때려눕히고 도주,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했다. 승려 생활 중 단양 이씨 성을 가진 비구니와 정분이 통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는다.

비구니의 배가 불러와 더이상 숨길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1892년 비구니의 고향인 북청에서 농사지으며 조용히 살기 위해 절을 떠났다. 홍범도는 개마고원에서 병졸 시절 배운 사격솜씨로 직업 포수로 성공한다. 그는 산포수 의병대를 조직하여 함경도 일대에서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연파했다. 덕분에 함경도 주민들은 홍범도를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사람”,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한 명장” 등으로 불렀다(장세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역사공간, 2017, 10쪽).

일본군의 추격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연해주로 망명한 홍범도는 한인 대표기관인 권업회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지원으로 조직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과 깊은 연계를 맺는다. 이때부터 공산주의 붉은 사조의 세례를 받았다는 뜻이다.

3·1운동 직후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 국경을 넘어 함경남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했다. 이것이 3·1운동 이후 독립군 최초의 국내 진입작전이었다. 9월에는 함남 갑산군의 금정 주재소와 일본 관공서를 습격했다. 10월에는 평북 만포진에 진입하여 일본군과 70여 명을 살상하여 국내 침공 작전 중 최대의 전과를 기록했다(장준익, 『북한인민군대사』, 서문당, 1991, 275쪽).

#. 봉오동·청산리대첩의 주역은 홍범도

홍범도는 1919년 8월 8일, 연해주 일대에서 모집한 대한독립군 106명을 인솔하여 간도로 이동한다. 홍범도는 최진동 부대와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결성한다. 1920년 5월 28일 안무의 국민회군까지 참여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軍督軍部)가 출범한다. 여기에 의군부·의민단·신민단이 합류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화룡현 봉오동에 근거지를 설치했다.

6월 7일, 봉오동 골짜기에서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매복 공격하여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승리를 거둔다. 상해 임정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 반면 독립군은 전사 4명(장교 1, 병사 3), 중상 2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홍범도와 김좌진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다. 7일 밤낮에 걸쳐 벌어진 10차례 전투는 김삼웅의 표현에 의하면 한국 독립군의 10전 10승. 일본군 1,200여 명을 섬멸하고, 독립군은 사상자 150명에 불과했다. 이름하여 청산리대첩이다.

김삼웅은 봉오동·청산리 대첩을 통해 독립군은 식민지 시대의 굴종을 어느 정도나마 씻게 되었고, 한민족의 상무정신을 이으면서 향후 어떤 외적의 침략에도 맞설 수 있는 국민적 자존과 결기를 보여주었다고 평했다(김삼웅, 『홍범도 평전-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도서출판 레드우드, 2019, 179쪽).

#. 너무나 과장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전과

그런데 국내외에서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전과가 너무 심하게 과장된 것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사키 하루다카(佐佐木春隆)는 1985년 발간한 『조선전쟁 전사로서의 한국독립운동의 연구(朝鮮戰爭前史としての韓國獨立運動の硏究)』에서 봉오동전투는 야스카와 추격대가 봉오동에서 독립군 24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부상자를 내는 전과를 기록했으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1명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청산리 일대에서는 일본군은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 말 10필의 희생을 치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두 전투와 관련, 동북아역사재단의 신효승·장세윤 등도 우리 측은 전과를 너무 확대 과장했고, 일본 측은 패전을 감추기 위해 피해를 너무 축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장세윤은 여러 자료를 토대로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100여 명 살상, 청산리전투에선 일본군 400~500여 명이 살상되었으며, 우리 독립군도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156쪽).

우리 독립군도 일본군 못지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장세윤의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봉오동·청산리전투는 ‘대첩’이 아니라 ‘무승부’로 정정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 아닐까?

봉오동·청산리에서 격전을 벌인 일본군은 독립군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북간도의 훈춘·왕청·화룡·연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일본군은 한인 가옥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으며, 한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이것이 경신(庚申)참변이다.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간도지역은 초토화되어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이후 만주를 무대로 하는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은 현저히 퇴조했다.

#. 소비에트 정부와 비밀협약 체결한 이동휘

홍범도·김좌진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은 청산리전투 이후 각자도생하기 위해 일본군 포위망을 뚫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한인사회당 대표 이동휘가 “소규모로 분산된 한인 무장부대를 단일대오로 통합하면 레닌 정부가 도와주기로 했다”면서 “한국 독립군은 자유시로 모여라”라는 선전을 했다.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김홍일의 증언에 의하면 간도의 한인 독립군들이 일본 토벌대에 쫓겨 러시아령으로 탈출했는데, 레닌 정부가 이들을 받아들여 전보다 한층 더 강력한 부대로 양성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레닌이 구상하고 있는 인터내셔널 오트랴드(국제군)를 편성하는데 한국 독립군을 가담시키기로 약속했다고 한다(김홍일, 『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83~84쪽).


볼셰비키의 도움을 받아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이동휘. 그는 소비에트 정부와 비밀공수동맹을 맺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산화, 그리고 한국 무장 독립군을 자유시로 유인하여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예속시키는 조건으로 100만 루블이라는 거액을 지원받았다.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흉계가 숨어 있었다.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모스크바에서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을 체결했다. 조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산주의를 수용하며,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 중인 한인 무장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편입시킨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 극비자료를 1920년 상하이에서 획득했고, 일본군의 간도 침략 과정에서 독립군으로부터 탈취했다. 비밀협약 관련 사항은 일본의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보도(1920년 10월 10일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신효승, 「20세기 초 국제 정세 변동과 한인 무장 독립운동」,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2018, 188쪽).

그에 대한 대가로 레닌은 몇 차례에 걸쳐 100만 루블의 거액을 이동휘 측에 제공했다. 이것이 이른바 ‘코민테른 자금 사건’이다. 코민테른 자금을 수령한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이후 일관되고 집요하게 임시정부 공산화 작업을 진행했다. 이동휘는 이승만의 친미 외교독립노선을 비판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손잡고 임정을 한인사회당 계열이 장악하려고 시도했다(박종효, 『러시아 연방의 고려인 역사』, 도서출판 선인, 2018, 290~291쪽).

이동휘는 “대한이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조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자”고 제안했으며, 태극기를 폐지하고 푸른 천에 세 개의 붉은 별이 있는 국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마뜨베이 찌모피예비치 김 지음·이준형 옮김,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 역사비평사, 1990, 106쪽). 또 임정을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시베리아로 옮기려 했다.

이런 급진적 주장은 임정 내 민족주의 세력인 이동녕·신규식·이시영·안창호 등에게 거부당했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개혁안을 국무회의에서 표결에 부쳐 처리하려 했으나 부결되자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 이동휘에게 속아 자유시로 이동한 홍범도

임정을 탈퇴한 이동휘는 간도·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를 시베리아 영내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진행했다. 뚜렷한 명분이나 이유 없이 부대를 이동시킬 수는 없는 일이므로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를 통합하여 단일 지도부를 구성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한인 무장부대의 집결지는 ‘자유시’로 선포된 아무르주의 스보보드니로 정해졌다.

소비에트 정부가 한국 독립군을 적군 산하로 편입시키기로 한 것은 일본과의 밀약 때문이다. 당시 7만 대군을 시베리아에 파병한 일본은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을 지원했다. 일본은 시베리아 철군을 위해 소비에트 정부와 다롄(大連)·창춘(長春)회담에서 철군 조건으로 만주·연해주 일대의 한국 독립군에 대한 ‘처리’를 요구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 요구를 수용한다.

홍범도를 비롯하여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부대 4,500여 명은 민족주의 성향, 공산주의 성향, 무정부주의 성향 등 잡다한 세력의 집합체였다. 이 무렵 시베리아 일대의 한인 공산주의 세력도 대한국민회의를 지지하는 이르쿠츠크파와, 이동휘를 지지하는 한인사회당파(상해파)로 분열되어 반목했다.

이 와중에 한인 무장부대가 자유시에 집결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을 서로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였다. 그 결과 한인 무장부대는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에 동조하여 적군 산하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르쿠츠크파 무장세력의 핵심은 자유대대였고, 상해파의 주력은 사할린부대였다.

사할린부대 편에 섰던 홍범도는 양파의 반목이 점점 심각해지고, 이르쿠츠크파의 배후에 소비에트 정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6월 2일 안무·최진동·지청천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 진영으로 돌아섰다.

#. 소비에트 적군에 가담, 한국 독립군 학살에 앞장선 홍범도

사할린부대가 적군 산하로의 편입을 거부하자 소비에트 정부는 6월 28일 새벽, 수라세프카에 주둔 중이던 사할린부대를 포위했다. 오후 2시, 적군 제29연대 소속 기병대와 장갑차를 앞세운 기갑부대와 이르쿠츠크파 자유대대 편에 선 홍범도·최진동·안무·이청천 등이 사할린부대를 공격했다.

그들은 기관총과 대포, 장갑차를 앞세워 적군 편입을 거부한 한국 독립군을 무차별 학살했다. 자유시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부대는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던 의군부 대원들이었다. 만주의 초원과 한만 국경지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전율에 떨게 했던 한국의 무장 독립군은 그렇게 비참하게 자유시 일대에서 동료들의 손에 사살당하거나, 제야강에 빠져 익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의 흑역사로 기록된 ‘자유시참변’이다.

포로가 된 독립군 428명은 죄수부대로 편성되어 우수문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벌목장에서의 강제노동은 가혹했고, 작업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견디다 못해 여러 사람이 벌목장을 탈출, 간도로 돌아갔다(박영석, 『한 독립군 병사의 항일전투』, 박영사, 1984, 179~181쪽). 나머지 72명(대부분 장교)은 중대범죄자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김홍일은 자유시 참변 당시 희생된 한국 독립군은 700~800명,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장으로 끌려간 인원수는 1,000여 명이 넘었다고 주장한다(김홍일, 앞의 책, 106쪽). 자유시참변으로 독립전쟁의 주인공들은 시베리아와 만주벌판 곳곳에서 사살·체포·강제노역 중 사망 등 모래알처럼 흩어져 소멸해 버렸다. 이로써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한국인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홍범도는 자유시참변에서 한국 무장독립군을 몰살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을 독립운동 역사가들은 왜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일까?

#. 이르쿠츠크에서 한국 독립군 강제 해산당하다

소비에트 적군 세력에 동조하여 동료를 몰살시키는 데 앞장섰던 홍범도를 비롯한 생존자 2,000여 명은 고려혁명군 여단으로 재편되었다. 1921년 7월 5일 코민테른은 고려혁명군에게 이르쿠츠크로의 이동을 명령한다. 그들이 이르쿠츠크에 도착 즉시 소비에트 정부는 한국 독립군 전원을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예속시켜버렸다. 이로써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레닌 정부와 체결한 공수동맹, 즉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한인 무장부대를 소비에트 적군에 귀속시키는 작업은 완벽하게 이행되었다.

적군 산하로 편입된 고려혁명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정신의 함양, 즉 공산화를 위한 혁명 교육에 돌입한다. 제1대대장에 임명된 홍범도는 스스로는 독립군 사령관을 저처했지만, 그의 공식 직함은 적군 내의 한인 빨치산(의용군) 대장이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의 일이다.

고려혁명군 여단은 1922년 4월 13일, 상부 지시에 의해 연대로 재편되면서 병력을 절반으로 축소했다. 한국 독립군 중 1,000여 명은 강제 제대시켜 연해주로 돌려보냈다. 같은해 9월에는 “한인부대의 임무는 완수되었다”면서 고려혁명군 해산을 명령했다.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에 집결했던 한국 무장독립군은 이로써 깨끗하게 해체되었다.

#. 레닌에게 격려금과 권총 선물로 받은 홍범도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미·영·불·일이 아시아·태평양 일대의 신질서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에 맞서 코민테른은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제1회 극동 제(諸)민족대회(극동인민대표대회)를 열었다.

홍범도는 제1회 극동 제민족대회에 참여하는 한인 대표 56명 중 일원으로 선출되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대회가 끝난 2월 초 홍범도는 한인 무장세력(고려혁명군) 대표 자격으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장세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역사공간, 2017, 221~223쪽).

홍범도는 1923년 8월 이만 근처 까잔린 구역(사인발)의 황무지에 집단농장을 세우고 동료 빨치산들과 함께 4년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양봉을 했으나 실패했다. 1928년 7월부터 1929년 가을까지 이만 남쪽 스파스크 진동촌으로 이주하여 항카호 옆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이것도 실패.

1937년 9월 초, 홍범도는 스탈린의 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된다. 그가 버려진 곳은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리야강 근처 전 아뤼크촌 사막지대였다. 1938년 4월, 생활환경이 좀 나은 크즐오르다로 이주한다. 크즐오르다의 조선극장의 수위장에 임명된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는 1943년 10월 25일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카자흐스탄 남부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의 묘역.
#. 홍범도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무슨 일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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